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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왜관시대 1

왜관이란

왜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일본인이 장사를 할 수 있는 포구를 조선의 조정에서 부산포와 제포에 세워 주었던 곳으로 접대처·무역처·유숙처·외교 교섭처 등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 공관이었으며, 본래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었으나 1674년(현종 14년)에 이건(移建)하였다. 왜관 내에는 연대청(宴大廳), 동관, 서관 객사(客舍) 등이 있어 일인(日人)과의 교역에 필요한 일체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1876년초량왜관장면모습

조선 태종 7년(1407년) 이전까지는 왜상고선(倭商賈船)이 드나들고 있던 포구에 상륙 지역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왜인(일본인)들은 일정한 거처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다가 태종 때에 이르러 국가 제도에 따라 상륙 지역이자 거류 지역으로서의 제한 구역인 왜관이 설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부터 왜관은 왜인들이 무역 거래를 일삼는 제한 구역이자 우리 나라쪽에서 그들을 접대하는 지정장소가 됐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 나라와 일본이 외교 문제를 협상하는 중요한 외교 무대가 되기도 했었다. 왜관은 달리 말하자면 상관(무역회관)이기도 하고 때로는 외교 공관이 되기도 하는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던 장소였으며, 오늘의 중구 지역에 일본인 전관 거주지역인 초량왜관이 설정된 것은 1678년의 일이었다.

11만평에 달했던 외관

그 규모는 약 11만평이었는데, 이는 당시 중국·일본·조선 즉 황양삼국중 부산왜관·부산항이 가장 넓었다. 당시 왜관에서는 매월 6번(3일·8일·18일·23일·28일)시장이 열렸는데 왜관내의 왜인 5~600명, 동래부의 문무·대소관원 및 그 가족까지 합하여 약 3,000명 정도였고, 때에 따라서는 5,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왜관 내에 상주하는 왜인 5~600백명, 그들의 임시 숙박하는 자, 그리고 장날에 모여드는 조·일의 상인과 그 관계인 역시 최소 5,000으로 추산하면, 결국 왜관의 무역에 직접·간접 관계한 자는 최소 10,000명 정도 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이전 왜관의 변천을 보면, 태종대에서 중종5년(1510년) 경오왜변 이전까지는 지금의 동구 좌천동 자성대 부근인 부산포 왜관(1407~1547), 선조 36년(1603년)에는 오늘의 영도구에 절영도 임시왜관(1601~1607), 오늘의 동구 수정동 지역에 두모포 왜관(1609~1677), 숙종4년(1678)부터 고종13년(1876년)까지 현 용두산 일대에 행정관서인 동관(동광동 쪽)과 동대청, 중대청 등이 있는 서관(신창동 쪽)의 형태로 초량왜관이 존속하다가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전관거류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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