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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1㎢ (중구 전체 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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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통 94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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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47명 (중구 전체 10.66%)
남 : 2,479명, 여 : 2,668명 -

- 24,5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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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1가 30 ☎ : 254-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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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1가, 2가, 3가, 4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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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49m)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광복동, 남쪽은 남포동, 북쪽은 보수동, 서쪽은 서구와 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사하면(沙下面) 부평리(富平里)였으며, 189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부평정(富平町)이라고 하였고, 1947년에 부평동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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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동은 부민동(富民洞)과 같은 어원(語原)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보수천 하구일대는 갈대밭과 풀밭이어서 예부터 샛디라고 불러왔는데, 샛디는 초량(草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보수천 일대의 샛디는 해정리(海町里, 현재의 초량)까지도 샛디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부평동, 부민동에서 초량까지를 모두 초량이라고 불렀다.
너무 넓은 지대를 아무리 인가가 적었던 시절이라 할지라도 모두 초량이라고 부르기에는 불편하였던 까닭에 현재의 초량은 신초량(新草梁)이라 부르고 상대적으로 원래의 초량은 구초량(舊草梁)이라고 불러왔는데 이런 호칭은 개항당시까지도 그대로 존속하였다.
부평동의 부(富)는 부산(釜山)의 옛지명인 부산(富山)과 같은 뜻에서 사용된 것이며 평(平)은 「터」란 뜻으로 샛디의 「디」와 통하는 자(字)로서 일제시대에도 부평정(富平町)이라 불렀으며 해방후에도 마찌(町)만 동(洞)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특히 부평동은 일제시대 제2호 시장형태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생긴 부평동시장이 있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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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후 우리의 시장형태는 통상 5일장이라는 것으로 일정한 장소에서 매일 또는 정기적으로 물건을 매매, 교환하는 것이고, 제2호 시장이란 20인 이상의 영업자가 한 장소에서 상행위(商行爲)를 하는 것이었다.
1910년에 설립된 부평동시장은 1915년 부산부영(釜山府營)으로 옮겼으나 그 일대도 역시 부평동이었다.
이 시장의 이용권은 인근 70리까지 세력이 미쳐 당시 조선내의 공설시장 중 최대의 것이었다.
이 부평동시장의 서편 윗쪽은 백풍가(白風街)라 불렀다. 이것은 이곳을 내왕하는 통상문(通常門)이 있어 항상 백의(白衣)를 입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수 운집하여 왜인상품을 구득(求得)코자 하였는데 백의인(白衣人)들의 집합소라고 하여 백풍가라 불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