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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2㎢ (중구 전체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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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통 146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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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66명 (중구 전체 24.79%)
남 : 5,858명, 여 : 6,108명 -

- 28,49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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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1가 95 ☎ : 254-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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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1가, 2가, 3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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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덕산에서 발원하여 대신동과 보수동을 거쳐 남항으로 유입되는 보수천(寶水川)이 흐르고 있으며, 동쪽은 대청동, 남쪽은 부평동, 북쪽과 서쪽은 서구와 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사하면(沙下面) 지역으로 부평리(富平里)라고 하였으며, 189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부평동을 분할하여 보수정(寶水町)으로 하였고, 1947년에 보수동으로 개칭하였다. 보수동은 보수천(寶水川)에서 비롯된 지명인데, 보수천은 부산개항 직후부터 부른 이름이며 그 이전에는 법수천(法水川=法首川)이라고 불렀다.
감동어기전말등록(監童漁其顚末騰錄)에는 구초량의 법수천(法水川) 동암(東岩)밖이 곧 왜관수문(守門)의 옆이라 하였고 순영등록(巡營騰錄)에는 초량 법수천(法水川)이라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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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法水)라 함은 불법(不法)이란 뜻으로 불법은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정하게 한다하여 물에 비유해 일컫는 말이며 또는 불법으로 중생의 마음속의 때를 씻어주는 물이란 뜻이다.
법수천(法水川)이라는 이름이 어느때부터 기원하였는지 그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옛날 구덕산(九德山)에 구덕사(九德寺)라는 오래되는 절이 있었고 또 이 절이 18세기 중엽 왜인들의 약탈에 못이겨 절을 다른 곳으로 옮겨 폐사(弊社)가 되었다는 기록 등을 아울러 생각해 볼 때 법수천(法水川)이라는 이름은 이곳 구덕사의 승려들이나 그 불신도(佛信徒)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법수천(法首川)은 법수천(法水川)에서 따온 말로 불교적 의미를 더욱 구체화하여 법주(法主), 법왕(法王)이란 뜻으로 윤색된 표현으로 보인다.
근대 개항 후 법수천의 법(法)을 보(寶)로 고쳐 보수천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그 뜻은 법수(法水)와 같은 것이다. 초량왜관시대에 왜관안에는 우물이 있어 개항 당시에는 이것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개항 후 일본군함의 빈번한 출입과 거류 일본인의 증가로 급수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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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1880년에 처음으로 보수천 상류로부터 대나무홈통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하였고, 그 후 1886년에는 나무통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하였다. 그러나 물은 날이 갈수록 모자라 1894년 보수천 상류에 물을 모으는 둑인 집수언(集水堰)을 만들고 자연여과 장치를 시공하였고 이와 아울러 거류지 가까운 높은 곳에 대청동 배수지를 설치하였다.
이 상수도 시설은 비록 일본인들의 필요에서 설치되기는 하였으나 뒷날 부산 상수도의 기원이 되었다.
행정동인 보수동은 법정동인 보수동1~3가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마을인 검정다리마을은 보수동1가의 흑교로터리 부근에 있던 마을이다. 검정다리는 중구와 서구를 잇는 보수천에 있던 다리인데, 사람들이 다리의 부식을 막기 위해 통나무 겉부분을 불로 까맣게 태워서 검정다리가 되었다 한다. 1940년에 콘크리트 다리가 새로 놓이고, 1987년에 보수천 복개공사로 다리는 없어졌지만 이 일대에는 흑교로, 검정다릿길 등 검정다리 이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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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으로는 영도세무서ㆍ중부산세무서ㆍ부산 시립 중앙도서관 등이 있으며, 보수동 헌 책방 골목은 8ㆍ15 광복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책을 난전을 벌여 팔던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그 형성의 바탕이 되었고, 1950년대 초 미군 병사들이 보 다 만 헌잡지와 학생들이 읽다 만 헌참고서를 끌어 모아 파는 헌책방 네군데가 생겼던 것이 지금의 시초가 되었다. 요즘에는 신간서적도 20~30%까지 싸게 살 수 있으며, 1996년 부터는 보수동 책방골목축제를 열어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